모두 다 괴로움을 고백하는 시대다. 또한 내부를 의심하는 시대이다. 공은 빨리 잊고 과는 오래 기억하는 시대이다. 과거의 영웅도 때론 속죄양으로 제단에 오르는 시대이다.
007 영화는 이런 점을 인상 깊게 보여줬다.
제임스 본드는 첩보원 체력시험에서 떨어지며 수준 이하의 능력을 보여준다. 체력검정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제임스 본드를 향해 조직은 예전 같은 믿음을 주지 않는다. 조직은 노골적으로 제임스 본드를 모독하는 발언을 해댄다.
영화 1편에서 십 수편이 나오기까지 종횡무진의 활약을 했지만 조직이 원하는 상태가 아니기에 영웅 제임스 본드도 내쳐진다. 목숨을 걸고 사선을 넘어도 고마움은 찰라이고 순간일 뿐이다.

이미 20여전 쯤 김지하는 중심이 괴롭다고 고백했고 김훈은 밥벌이가 지겹다고 밝힌 바 있다. 중심이 괴롭다는 말은 주변도 괴롭다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들린다. 그냥 여기나 저기나 다 괴롭다라고 말할 수 있을 듯 하다.
이는 어찌보면 매우 자학적인 요소가 담긴 말이라고 할 수 있다. 007은 조직으로부터 디스를 당해 위축되고 초췌해지지만 김지하는 스스로를 지우려 한다. 자신이 스스로 배척하고 스스로 디스 하려 한다.
자기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나 잊는 것만으로 부족해 그가 살았던 시대와도 ‘동귀어진’하려 한다. 어떻게 보면 이런 행위는 매우 위악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엄혹한 시대를 그나마 잘 견디었다고 생각한 분들이 사실 매우 피폐돼 있고 상처투성이이고 감당하기 어려운 고뇌를 짊어졌다는 것에 우리는 놀란다.
007이 영웅적인 성과를 거두는 과정에서 매우 상처받고 부상당하고 심신이 피폐됐던 것을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화려한 음악에 소음총을 날리는 화려한 첩보원의 그늘에 그러한 아픔이 있었다는 것을 전혀 몰랐듯이 말이다.
김지하는 1990년대 중반에 007의 허전한 마음을 그의 시에서 보여줬다. “그날은 없다/있는 것 살아 있는 것은 지금 여기/여기서 저기로/지금에서 옛날 훗날로/위아래로 사방팔방으로/살아넘치는 지금 여기/ 끝없는 그날이 있다”
김지하는 ‘그날’을 거부한다. 자신이 다 바친, 타는 목마름으로 쓴 그날을 거부한다. 피 떨리는 노여움으로 보냈던 그날을 거부한다. 황토길 같이 팍팍했던 자신이 걷던 길도 지워버렸다. 그것을 지운 현재의 그는 사회와 정치에 지친 모습을 보여준다.
사회와 정치를 뺀 인간을 갈구한다. 그는 투쟁의 시대의 치열함이 이제는 두렵다. 왜냐하면 치열함이 자신을 중심에 서게 했기 때문이다. 그로인해 그는 개인의 인생은 초토화됐고 또 그가 추구했던 그날도 오지 않았다는 점을 토로한다.

김훈도 이점에서는 비슷한 요소가 있다. 김훈은 노동의 신성함을 정면으로 디스한다. 그는 그가 기자 일을 하면서 쓴 세설에 밥벌이의 지겨움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정말 위악적인 요소가 많은 제목이다.
그가 숭고한 기자 일을 밥벌이라고 비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근로를 신성하다고 우기는 사람들을 증오한다고 밝힌다. “누구나 하기 싫어하는 3D업종으로부터 스스로 도망쳐서 자신의 존엄을 지키는 인간들의 저 현명한 자기 방어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김훈은 제발 열심히 일하라고 조져대지 말라고 요구한다. 밥을 위해 곤죽이 되도록 이미 일했다는 점을 드러낸다.
이제 결론을 낼 때가 왔다. 김훈이 말한 것처럼 우리들의 목표는 끝끝내 밥벌이가 아니다. 007 제임스 본드가 밥벌이 때문에 총질을 하며 사선을 넘었다고 볼 수 있을까? 김지하의 그날에는 밥벌이가 몇 퍼센트 포함돼 있을까?
김훈이 기자가 됐던 것이 밥벌이 때문이었을까?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일하는 사람들과는 동떨어진 사치스런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결국 잘난 불만들에는 자신의 일이 밥벌이 이상이 되기를 원했던 마음이 깔려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이 증언한대로 고난이 희망이 된 사람보다는 고난 때문에 병들고 더 쓸모없는 인물이 된 사람이 많다. 조직을 위해서 일했지만 정당한 보상보다는 그 무모한 도전들 때문에 디스 당하는 사람들이 많다.
김훈의 말대로 단 한줄기라도 고난이 희망이 되기를 갈망했기 때문에 열심히 한 것이 죄라면 죄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