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이 죽은 시대가 좋은 시대이다. 힘없는 백성에게는 영웅이 있는 시대가 그리 좋은 시대가 아니다.
역사상 가장 영웅이 가장 많이 등장하는 시대일수록 일반 백성들의 삶은 매우 고달팠다. 노자는 좋은 정치란 작은 생선을 굽듯이 조심스럽게 지켜보는 것이라고 했다.
공자는 신의가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가장 영웅이 많이 등장하는 소설은 삼국지이다. 그 등장인물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군웅이 할거한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유비, 장비, 관우, 조조, 손권, 주유, 여포, 원소 등 열거하면 끝이 없을 정도다.
하지만 거론된 인물들이 입으로 백성을 위한 것만큼 백성들이 만족했는가는 증명된 바 없다. 삼국으로 갈려서 몇십년 동안 전쟁을 하는 것이 태평성대보다 못하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영웅의 존재에 대해서 부정적인 접근을 하는 소설로는 수호전을 들 수 있다. 서른 여섯의 천강성과 일흔 둘 지살성의 귀신들은 봉인에서 풀려난다. 이들이 세상에 풀려나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귀신들이란 사실은 민중들의 한을 108명의 영웅들이다.
영웅이란 이중적인 존재이다. 묵자는 죄 없는 사람 한 명을 죽이면 살인자가 되고 열 명을 죽이면 열 명을 죽인 불의가 되는데, 남의 나라를 침략한자는 불의인줄 모른다고 개탄한 바 있다.
묵자는 이를 의롭다까지 말하는 것에 대해 침통해 했다. 영웅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을 희생시키거나 고통을 줘야한다는 것을 묵자는 알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전쟁이나 전운이 감돌면 가장 고통받는 것은 군인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이다. 가족과의 생이별, 불편한 거주 환경, 여의치 않은 보급, 생명의 위협 등 정상생활을 할 수 없는 나락으로 곤두박질 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웅을 흠모하고 그런 존재가 나타나기를 바라는 세상은 나의 자유의지가 통하지 않은 세상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마의 폭정에 시달린 이스라엘은 메시아가 구원해주길 기다렸다. 메시아가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메시아를 단죄까지 한 것이 ‘예수사건’이다.
영웅을 대망한다는 것은 그 사회의 이성적 기제가 무너지고 있다는 점을 반증한다. 주체적으로 어떤 고난을 극복하기 보다는 남의 힘으로 어려움에서 탈출하려는 의도가 강하기 때문이다. 일제시대에 자강운동과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영웅대망사관이 꽃피웠다.
국권회복을 위해서 조선에도 많은 영웅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후세에 알리려야만 했다. 영웅대망론은 영웅숭배론으로 화하기도 했다. 영웅은 현실타개의 가능한 존재이며 국치를 타개할 수 있는 사상적 근원이라는 생각을 했다. 일제 때 대거 등장한 영웅은 을지문덕, 이순신, 안중근, 김유신, 최영, 임경업, 연개소문 등 대개의 전쟁영웅들이었다.
일제시대 국민들의 절망이 컸기 때문에 이 많은 영웅들이 등장했으리라 본다. 이분들을 살려 민족정기를 되살리고 자긍심을 고취시켰다고 본다. 역사적으로 영웅의 숫자가 많을수록 그 시대의 백성들은 긴 싸움을 했거나 긴 고초를 겪었으리라고 본다.
일제시대 때 영웅이 부족한다고 느낀 신교육을 받은 선각자들은 가리발디, 나폴레옹, 모세, 콜럼버스, 리빙스톤, 워싱턴, 올리버 크롬웰 , 링컨 ,마젤란 등 서구인까지 영웅으로 등장시켰다.
이들 중에는 다른 시각으로 보면 문제적인 인물들이 많다. 어느 한 민족이나 집단에게는 용서하지 못할 인사들도 있다.
아프리카를 백인의 식민지로 개척한 리빙스턴이나 아메리카에 상륙한 콜럼버스는 어느 한 쪽에서 본다면 탐탁지 않은 인물일 수 있다. 서양이든 동양이든 이름만 나면 무조건 영웅으로 인정해야 할 만큼 일제시대는 영웅이 주린 시대였다.
박은식 선생은 한국사에서 저항적인 열혈아가 없다고 개탄까지 했다. 뜨거운 남자, 열정이 있는 사람, 신념이 투철한 사람, 뜻을 이룬 사람 , 고난을 극복한 사람은 모두 다 쓸 만한 대상이었다. 국적, 행위, 계급 등을 가리지 않고 영웅마저 수입해야 했다. 하지만 이를 무조건 부정적으로 볼 수만은 없다.
국권회복을 위한 절박함과 자강자주독립을 위한 현실인식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박은식 선생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영웅에 냉담했다고 지적했다. 열거된 인물들은 오늘날의 시각에서 본다면 무분별한 외래인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시대가 스스로 힘으로 빠져 나오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 시대이성은 영웅을 흠모한다. 영웅을 만들어내고 그를 우상화시켜 그 힘으로 빠져 나오려 한다.
영웅혼을 부활하여 자유종을 울리게 하려는 영웅은 일제시대면 족하다. 영웅이 또 활개 치려는 혹은 영웅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면 애처롭다.
아직은 '난세'인가 보다.